묻힌 이야기들 EXCAVATION №2026

니콜라스 윈튼: 669명을 구하고 50년 침묵한 영국 은행원

니콜라스 윈튼: 669명을 구하고 50년 침묵한 영국 은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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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BBC 스튜디오의 그 순간

1988년 2월의 한 BBC 방송 “That’s Life”의 생방송 중 진행자 에스더 랜첸이 한 노년의 신사에게 물었다. “여러분, 이 자리에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어린이 669명을 구해낸 분이 계십니다. 그분 옆에 앉아 계신 분들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노신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가 앉아 있던 방청석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50년 전 그가 구한 아이들이었다. 79세의 영국 은행원 니콜라스 윈튼은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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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38년 12월, 한 청년의 결정

1938년 12월, 29세의 영국 은행원 니콜라스 윈튼은 스키 휴가를 위해 스위스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친구 마틴 블레이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스키 대신 프라하로 와주십시오. 여기 위급한 일이 있습니다.” 마틴은 체코슬로바키아 난민 구호 활동을 하고 있었고, 윈튼에게 즉시 도움이 필요했다. 윈튼은 스키 휴가를 포기하고 프라하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프라하는 이미 나치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있었고, 유대인 가족들은 자식들이라도 안전하게 영국으로 보내고자 절박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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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청년이 만든 가상의 위원회

프라하에서 윈튼은 한 호텔 방을 빌려 자신만의 임시 사무실을 차렸다. 그는 그 사무실 문에 다음과 같이 적힌 종이를 붙였다. “영국 난민 위원회 어린이부.” 사실 그런 위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윈튼이 한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낸 가상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 단체 이름으로 그는 영국 정부와 영국 가정에 어린이들의 위탁 양육을 요청했다. 윈튼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매일 200명 이상의 부모를 만났다. 그들은 자식의 사진과 정보를 들고 와서 영국행 기차 명단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간청했다. 한 부모는 후에 회상했다. “그것은 위원회가 아니라 한 청년의 호텔 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4. 8회의 기차와 669명의 어린이

1939년 3월 14일, 윈튼이 조직한 첫 번째 어린이 기차가 프라하 윌슨 역을 출발했다. 기차에는 어린이 20명이 타고 있었다. 이후 5개월간 윈튼은 총 8회의 기차를 운행했다. 각 기차마다 평균 약 80명의 어린이가 탑승했고, 모두 영국 가정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1939년 9월 1일, 윈튼은 가장 큰 9번째 기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기차에는 250명의 어린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모든 국경이 즉시 봉쇄되었고, 9번째 기차는 영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250명의 어린이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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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락방의 가죽 가방

전쟁이 끝난 후 윈튼은 영국으로 돌아와 평범한 은행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939년의 모든 기록을 가죽 가방 하나에 정리해 다락방에 보관했다. 그 가방에는 669명 어린이의 이름, 사진, 영국 위탁 가정 주소, 모든 통신 기록이 들어 있었다. 윈튼은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아내에게조차 그 가방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한 일은 누군가의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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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88년 아내 그레타의 발견

1988년, 윈튼의 아내 그레타가 다락방을 정리하다 그 가죽 가방을 발견했다. 그녀는 가방을 열고 사진과 이름들을 보았다. 그녀가 남편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제야 윈튼은 처음으로 1939년 자신이 한 일을 아내에게 설명했다. 그레타는 그 자료를 즉시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맥스웰에게 전달했다. 맥스웰은 그 자료의 가치를 즉시 알아보고 BBC 방송 “That’s Life”의 프로듀서에게 연락했다. 그것이 그 해 2월 BBC 생방송에서 윈튼이 50년 만에 자신이 구한 아이들과 다시 만나게 된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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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방청석에서 일어선 30명

1988년 2월 27일 BBC 방송 “That’s Life”의 생방송에서 진행자 에스더 랜첸은 윈튼에게 1939년 일을 간단히 소개한 후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옆에 앉은 한 중년 여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베라 길리스만입니다. 1939년 7월 윈튼 씨가 운행한 기차에 탑승한 어린이였습니다.” 베라가 윈튼을 안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구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 다음 순간 랜첸은 방청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이 구한 어린이가 또 누가 이 자리에 있는지 보시겠습니까. 1939년의 그 아이들이 여기 있습니다. 일어서주세요.” 그 한 줄에 방청석의 약 30명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윈튼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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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윈튼의 마지막 26년

BBC 방송 이후 윈튼의 이야기는 전 세계로 퍼졌다. 영국 여왕은 그에게 작위를 수여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최고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윈튼 자신은 일관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저 그때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2015년 7월 1일, 106세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1939년 그가 구한 어린이들의 후손 약 6천 명이 참석했다. 윈튼이 구한 669명의 아이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손주까지 본 결과였다. 한 사람의 5개월간의 노력이 약 6천 명의 인생을 만들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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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프라하 윌슨 역의 동상

오늘날 체코 프라하 윌슨 기차역에는 윈튼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윈튼이 한 어린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동상 발치에는 영문과 체코어로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구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한 어린이를 구할 수는 있다.” 매년 3월 14일, 첫 번째 기차가 출발한 그날 프라하 윌슨 역에서는 추모식이 열린다. 윈튼이 구한 669명의 후손이 그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의 5개월간의 결정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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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윈튼이 평생 침묵한 진짜 이유

윈튼이 50년간 침묵한 이유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윈튼 자신이 평생 반복한 말 안에 있다. “저는 그저 그때 거기 있었을 뿐입니다.” 윈튼은 자신이 한 일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평생 믿었다. 윈튼의 침묵은 겸손이라기보다 자기 행위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가까웠다. 그는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을 특별한 것으로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의 행동을 더 빛나게 만드는 이유다.

11. 마치며: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1938년 12월 29세의 한 은행원이 스키 휴가를 포기하고 프라하로 향했다. 그가 한 일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호텔 방 하나, 가상의 위원회 이름 하나, 8회의 기차, 그리고 669명의 어린이. 그가 한 일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영웅적 행동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윈튼이 50년간 침묵한 이유도 같았다. 그것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평생 믿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구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한 어린이를 구할 수는 있다. 그것이 프라하 윌슨 역의 동상 발치에 새겨진 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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