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11년 라임 레지스의 12세 소녀
1811년 영국 도싯주 라임 레지스의 한 해변에서 12세 소녀 메리 애닝과 그녀의 오빠 조셉이 평소처럼 화석을 캐고 있었다. 그날 그들이 절벽 아래 진흙에서 파낸 것은 길이 약 5미터, 무게 약 1톤의 거대한 어룡 화석이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어룡 화석이었고, 19세기 초 유럽 학계가 믿고 있던 “노아의 홍수 6천년 지구설”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화석이었다. 그러나 그 발견을 한 12세 소녀의 이름은 50년 가까이 영국 왕립학회의 어떤 학술 출판물에도 등장하지 못했다.

2. 1799년 가난한 가구공의 딸
메리 애닝은 1799년 5월 21일 영국 도싯주 라임 레지스의 한 가난한 가구공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리처드 애닝은 가구 제작 외에 라임 레지스 해변에서 화석을 채굴해 관광객에게 판매하는 부업을 하고 있었다. 메리는 4세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해변에서 화석을 캐기 시작했다. 1810년 그녀의 아버지가 결핵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가족은 약 120파운드의 빚과 어떤 수입원도 없는 채로 남겨졌다. 11세 소녀 메리와 그녀의 가족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해변에서 화석을 캐서 파는 것이었다.

3. 매일 죽음과 마주한 일
메리와 조셉이 1811년 발견한 어룡 화석을 캐는 일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다. 라임 레지스 해변은 부드러운 점토와 셰일로 이루어진 절벽이 끊임없이 무너지는 곳이었고, 화석을 찾기 위해서는 폭풍이 지난 직후 절벽이 가장 불안정할 때 그곳에 가야 했다. 1833년 메리는 한 절벽 무너짐 사고로 자신의 충실한 반려견 트레이를 잃었다. 트레이는 메리를 따라 해변에 갔다가 한 절벽 무너짐에 그대로 매장되었다. 메리 자신도 평생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그녀의 일생은 매일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4. 1823년 플레시오사우루스의 충격
1823년, 24세의 메리 애닝은 그녀의 일생 두 번째 큰 발견을 했다. 라임 레지스 해변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의 플레시오사우루스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길이 약 3미터, 긴 목과 작은 머리를 가진 이 해양 파충류의 화석은 당시 유럽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 왕립학회는 화석을 검토하기 위해 즉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에서 발견자의 이름은 “한 무명의 라임 레지스 화석 채굴자”로만 표기되었다. 메리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같은 화석을 학계에 “소개”한 윌리엄 코니베어 목사의 이름이 보고서 전체에 등장했다.

5. 1828년 익룡과 박물관 80퍼센트의 화석
1828년 메리는 영국에서 처음으로 익룡 화석을 발견했다. 라임 레지스 해변에서 발견된 이 익룡은 후에 디모포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830년에는 두 번째 완전한 어룡 화석을 발견했고, 1832년에는 새로운 종의 어룡 템노돈토사우루스를 발견했다. 약 20년 동안 메리는 거의 모든 새로운 영국산 해양 파충류 화석을 발견했다.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 보관된 1810년대부터 1840년대 라임 레지스 해변 화석의 약 80퍼센트가 그녀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학술 출판물에도 그녀의 이름이 발견자로 인용된 사례는 없었다.

6. 왕립학회가 외면한 두 가지 구조적 이유
메리 애닝이 영국 왕립학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19세기 영국 학계의 두 가지 구조적 장벽 때문이었다. 우선 그녀는 여성이었다. 1830년대 영국 왕립학회의 정식 회원은 모두 남성이었고, 여성에게 정식 회원 자격이 허용된 것은 1945년 이후였다. 또한 그녀는 비국교도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다. 19세기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려면 옥스퍼드 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이어야 했고, 그 두 대학은 영국 국교회 신자만 입학할 수 있었다. 메리는 평생 정식 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화석 지식은 자기 학습과 해변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7. 1838년 익명의 후원금과 1846년 연금
1830년대 후반 메리의 가족은 다시 한번 극심한 빈곤에 빠졌다. 그녀가 발견한 화석 가격이 폭락한 시기였다. 1838년 영국 왕립학회 학자 헨리 데 라 베셰는 메리의 상황을 알게 된 후 동료들에게 호소했다. 결국 그는 약 50파운드의 익명 후원금을 모아 메리에게 전달했고, 이후 1846년 매년 25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도록 영국 왕립학회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원에도 그녀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왕립학회 학술 출판물에 발견자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돈은 지급되었지만 인정은 끝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헨리 데 라 베셰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녀의 발견 없이는 우리 학회의 어떤 진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공식 출판물에 적는 것은 학회 규정상 불가능합니다.”

8. 1847년 47세의 죽음과 한 통의 추모
1847년 3월 9일, 메리 애닝은 영국 도싯주 라임 레지스의 자택에서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그녀의 일생을 가장 잘 알았던 한 사람, 영국 지질학회 회장 헨리 데 라 베셰는 그녀의 사망 후 한 통의 추모 편지를 학회에 보냈다. 그 편지는 영국 지질학회 학술지의 부고면에 게재된 단 한 통의 추모 편지였다. 이전까지 영국 지질학회는 정식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 추모 편지를 게재한 적이 없었다. 그 한 통의 편지가 메리 애닝이 영국 학계에서 받은 평생의 유일한 공식 인정이었다. 같은 학회가 그녀의 정식 회원 자격을 인정한 것은 그녀가 죽은 후 110년이 지난 1957년이었다.

9. 2022년 11세 소녀의 4년간 캠페인
오늘날 라임 레지스 해변에는 메리 애닝의 청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그녀가 화석 망치를 들고 절벽 아래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동상은 2022년 한 11세 소녀 에비 스원슨의 4년간의 캠페인 끝에 마침내 세워졌다. 에비는 8세 때 메리 애닝의 일생을 알게 된 후 “왜 메리 애닝의 동상이 없는지” 의문을 가지고 영국 정부에 청원을 시작했다. 그녀의 캠페인은 약 11만 명의 서명을 받았고, 마침내 한 어린 소녀의 4년이 한 잊혀진 여성의 200년 만의 첫 동상을 세웠다. 한 시대의 차별이 만든 침묵을 다른 시대의 어린 소녀가 깬 것이다.

10. 메리 애닝이 발견한 것의 진짜 의미
메리 애닝의 발견이 19세기 유럽 학계에 충격을 준 진짜 이유는 그것이 “지구의 나이”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1811년 당시 유럽 기독교 학계의 대부분은 지구가 약 6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노아의 홍수 6천년 지구설”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메리가 발견한 어룡, 플레시오사우루스, 익룡 같은 거대한 해양 파충류는 현재 어떤 동물과도 비슷하지 않은 생물이었고, 분명히 6천년 전이 아닌 훨씬 더 오랜 옛날에 살았던 동물들이었다. 그녀의 화석은 지구가 수억 년 전부터 존재했고, 다양한 시대에 다른 생물들이 살고 멸종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최초의 결정적 증거 중 하나였다. 그녀의 발견 없이는 다윈의 진화론도 등장할 수 없었다.
11. 마치며: 200년의 침묵이 깨진 순간
1799년 영국 도싯주의 한 가난한 가구공의 딸이 12세에 어룡 화석을 발견해 지구의 나이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바꿨고, 평생 약 20년간 영국 최고의 화석학자로 활동했으며, 47세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평생 단 한 번도 영국 왕립학회 학술 출판물에 발견자로 등장하지 못했다. 200년이 지난 2022년 마침내 한 어린 소녀의 캠페인 끝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 사람의 일생이 200년의 침묵 끝에 다시 빛나기 시작한 사례다. 우리가 오늘날 누구의 이름을 가리고 있는지 한 번 더 돌아봐야 할 이유가 그 200년의 침묵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