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힌 이야기들 EXCAVATION №2026

리제 마이트너: 핵분열을 계산하고 노벨상에서 지워진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 핵분열을 계산하고 노벨상에서 지워진 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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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4년 노벨상 발표의 그날

1944년 12월, 스웨덴 한림원은 그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수상자는 독일 화학자 오토 한, 수상 사유는 “중원소의 핵분열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핵분열을 발견한 1938년 12월 그날, 오토 한과 함께 30년간 공동 연구를 수행한 한 사람의 이름은 수상자 명단에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제 마이트너였다. 그녀는 핵분열을 수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이었고, 오토 한이 베를린에서 실험할 때 스웨덴 망명지에서 그 실험의 의미를 풀어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1944년 노벨상은 오토 한 단독 수상이었고, 마이트너의 이름은 어떤 공식 문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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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78년 비엔나의 8남매

리제 마이트너는 1878년 11월 7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한 유대인 변호사 가문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890년대 오스트리아에서는 여성에게 정식 고등 교육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사립 교사를 통해 물리학과 수학을 독학했다. 1897년 오스트리아가 여성에게 대학 입학을 허용하자, 그녀는 즉시 비엔나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906년 28세에 비엔나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비엔나 대학교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물리학 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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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07년 베를린 지하 작업장

1907년 28세의 마이트너는 베를린 대학교의 막스 플랑크 교수 아래에서 박사 후 연구 과정을 시작했다. 같은 해 베를린 대학교에서 그녀는 한 평생의 공동 연구자 오토 한을 만났다. 오토 한은 화학자였고 마이트너는 물리학자였다. 두 사람의 성격과 학문적 강점은 정반대였다. 한은 신중하고 실험에 능숙했고, 마이트너는 이론에 능숙하고 수학적 사고가 뛰어났다. 그러나 1907년 당시 베를린 대학교 화학과는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마이트너가 한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화학과 지하 작업장에 마련된 별도의 작업실에서 일해야 했고, 화장실 사용도 금지되었다.

4. 30년의 공동 연구

1907년부터 1938년까지 약 30년 동안 마이트너와 한은 베를린에서 핵 화학을 공동 연구했다. 1917년 두 사람은 새로운 원소 프로탁티늄을 함께 발견했고, 1923년에는 오제 효과를 마이트너가 한과는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1926년 마이트너는 베를린 대학교의 정식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독일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물리학 정교수였다. 1930년대 두 사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새로운 “초우라늄 원소”를 만드는 연구에 집중했다. 그것이 1938년의 핵분열 발견으로 이어진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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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38년 7월 비밀 탈출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마이트너의 처지는 갑자기 위태로워졌다.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그녀의 오스트리아 시민권이 자동적으로 독일 시민권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7월 13일, 그녀의 동료들이 비밀리에 그녀의 탈출을 계획했고, 그녀는 단 한 개의 작은 가방만 들고 베를린을 떠났다. 그녀는 네덜란드를 거쳐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연구실을 시작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오토 한은 베를린에서 두 사람이 함께 시작한 우라늄 실험을 계속했고, 마이트너와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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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38년 12월 19일의 그 편지

1938년 12월 19일, 마이트너는 베를린의 오토 한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한이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킨 후 발견한 이상한 결과가 적혀 있었다. 우라늄을 충돌시킨 후 생성된 물질이 “바륨”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우라늄은 원자번호 92, 바륨은 원자번호 56이었다. 우라늄에 중성자 하나만 더하면 어떻게 그 절반 크기인 바륨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한은 화학자로서 그 의미를 풀 수 없었다. 그는 마이트너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와주십시오.” 마이트너는 며칠 후 자신의 조카이자 물리학자인 오토 프리시와 함께 스웨덴 산골 한 시골 호텔에서 그 편지를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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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웨덴 호텔 정원의 수식

193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직전, 마이트너와 프리시는 스웨덴 쿵엘브의 한 시골 호텔에서 한의 편지를 검토했다. 두 사람은 호텔 정원에 앉아 한이 발견한 결과의 의미를 수학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마이트너는 닐스 보어의 “액체방울 핵 모형”을 이용해 결정적인 계산을 했다. 무거운 우라늄 원자핵이 액체방울처럼 늘어나다가 결국 두 조각으로 “쪼개진다”는 가설이었다. 그녀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적용해 그 “쪼개짐” 과정에서 약 200메가전자볼트의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계산했다. 이것이 후세에 “핵분열”이라 불리게 된 현상의 첫 수학적 설명이었다. 1939년 2월, 마이트너와 프리시는 학술지 네이처에 첫 “핵분열”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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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44년 노벨상 단독 수상의 진짜 이유

1944년 12월 스웨덴 한림원은 오토 한 단독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했다. 마이트너의 이름은 어떤 공식 문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한림원의 결정 이유는 표면적으로 두 가지였다. 우선 핵분열의 “발견”은 한의 화학 실험이었고, 다음으로 마이트너는 1938년 이후 독일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한림원 내부 토론 기록이 1980년대 공개되면서 진짜 이유가 밝혀졌다. 한림원 화학 분과는 마이트너의 이론적 기여를 “단지 한의 결과를 해석한 것”으로 폄하했고, 물리학 분과는 “발견 자체는 화학 실험”이라며 그녀를 물리학상에서도 배제했다. 두 분과의 결정 사이 그녀의 30년 공동 연구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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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토 한의 평생 침묵

오토 한은 1944년 노벨상 수상 후 사망할 때까지 마이트너의 기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사망한 후 공개된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핵분열 발견을 “자신의 화학 실험의 결과”로만 묘사했다. 마이트너의 이름은 자서전에 단 한 번 등장했는데, “한때 베를린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동료”라는 짧은 표현이었다. 한이 평생 침묵한 이유에 대해 후세 과학사학자들은 여러 해석을 내놓았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노벨상 수상 후 자신의 단독 영예를 인정하면 그녀의 30년 공동 연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 1968년 사망과 1982년 마이트너륨

마이트너는 1968년 10월 27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89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시가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다. “리제 마이트너, 인간성을 잃지 않은 한 물리학자.” 1982년 독일 다름슈타트의 중이온 연구소가 합성한 109번 원소가 마이트너의 이름을 따 “마이트너륨”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한 여성의 이름이 단독으로 화학 원소에 붙은 두 번째 사례였다. 첫 번째는 마리 퀴리의 이름이 폴로늄에 폴로니아의 의미로 들어간 사례뿐이었다. 1944년 노벨상에서 지워진 그녀의 이름은 사후 60년이 지난 현재 마이트너륨의 이름으로 영원히 주기율표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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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치며: 노벨상보다 주기율표

1878년 비엔나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1907년부터 1938년까지 30년간 베를린에서 핵 화학을 공동 연구했고, 1938년 핵분열 현상을 수학적으로 처음 설명했으나 1944년 노벨상에서 단독 수상의 영예에서 배제되었다. 그녀가 1968년 89세에 사망한 후 14년이 지나 한 화학 원소가 그녀의 이름을 받았다. 노벨상의 결정은 한 시대의 한 학회가 한 사람의 기여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지만, 주기율표는 우주의 보편적 진리를 보여주는 표다. 노벨상에서 지워진 마이트너의 이름이 주기율표에 영원히 새겨진 것은, 한 시대의 차별이 마지막에는 결국 보편적 진리에 굴복했음을 보여주는 작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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