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2년 가을 사과나무 아래의 두 유리병
1942년 가을, 독일 점령기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정원 사과나무 아래에서, 한 여성이 두 개의 유리병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유리병 안에는 종이쪽지가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종이마다 어린아이의 이름과 게토 안에서 부르던 폴란드식 가명이 적혀 있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이레나 센들레르였고, 그녀의 직업은 바르샤바 시청의 사회복지사였으며, 그녀가 그 유리병에 적은 이름은 약 2500명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 많은 아이를 게토 밖으로 빼냈을까. 그리고 왜 그녀의 이름은 1965년에 와서야 이스라엘에 의해 처음 불려지게 되었을까.

2. 사회복지사라는 합법 신분
이레나 센들레르는 191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의사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유대인 환자들도 무료로 진료했고, 어린 이레나는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며 자랐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센들레르는 바르샤바 시청 사회복지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1940년 11월, 독일군은 바르샤바에 게토를 설치하고 약 40만 명의 유대인을 가로 약 3.4킬로미터의 좁은 구역에 가두었다. 사회복지사인 센들레르는 위생국 직원이라는 명목으로 게토에 합법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게토 안에 발진 티푸스가 창궐하고 있었고, 독일군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옮을까 두려워 폴란드 위생국의 출입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3. 제고타라는 비밀 조직과 30명의 동료
1942년 7월, 독일군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약 30만 명의 유대인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게토의 인구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 무렵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원을 받은 비밀 조직 “제고타”가 결성되었고, 센들레르는 그 산하 아동 구출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제고타의 목표는 단 하나, 게토 안의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밖으로 빼내 폴란드 가정과 수녀원에 숨기는 것이었다. 센들레르는 구출 작업에 약 30명의 동료를 모았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이 매일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합류했다. 게토에서 유대인 한 명을 숨기는 사람은 발각 즉시 가족 전체가 처형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 구급차 가방과 관 속의 아기들
센들레르의 구출 방법은 여섯 가지에 달했다. 구급차 바닥의 가방, 우편물 자루, 시신용 관, 하수도 통로, 법원 건물 출입구, 그리고 위생국 트럭이었다. 어린 아기는 가방에 넣어 진정제를 먹인 후 구급차 바닥에 숨겼고, 그보다 큰 아이는 우편물 자루나 빈 관에 넣어 영안실 차량으로 옮겼다. 어떤 날은 한 신부가 자신의 사제복 안에 아기를 숨겨 데리고 나왔고, 어떤 날은 구급차 운전기사가 게토 정문 검문소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짖는 개를 데리고 다녀 아이의 울음소리를 가렸다. 그 개의 이름은 “산드라”였고, 산드라는 폴란드 게토 구출 작전의 가장 충실한 동료였다. 매일 평균 약 8명의 아이가 게토 밖으로 옮겨졌다.

5. 어머니들에게 건넨 마지막 약속
센들레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은 게토 안에서 부모를 만났을 때였다. 그녀는 게토의 한 작은 방에서 어머니에게 다가가 한 가지 약속을 건네야 했다. “이 아이를 게토 밖으로 데려가도 될까요.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게토에 남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즉시 아이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고, 어떤 어머니는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흐느꼈으며, 어떤 어머니는 끝까지 거절했다. 센들레르는 후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마지막 자녀를 빼앗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빼낸 아이의 약 절반은 부모와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했다.

6. 사과나무 아래에 묻은 명단
센들레르는 게토 밖으로 빼낸 모든 아이의 본명, 부모의 본명, 게토 밖에서 받은 폴란드식 가명, 그리고 숨겨진 위치를 한 장의 종이에 적어 두 개의 유리병에 나누어 보관했다. 그 유리병은 그녀의 동료 야니나 그라보프스카의 정원 사과나무 아래에 묻혀 있었다. 그녀가 이 위험천만한 명단을 만든 이유는 단 하나,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아이들이 자신의 진짜 이름과 가족을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명단은 종이 위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고, 모든 이름은 약 2500개에 달했다. 그 명단은 게토 외부에 알려지면 즉시 게슈타포가 추적해 모든 아이의 은신처를 발각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문서였다. 그러나 센들레르는 그 위험을 감수했다.

7. 1943년 10월 파비악 감옥의 고문
1943년 10월 20일 새벽, 게슈타포 11명이 센들레르의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한 동료의 배신으로 그녀의 신원이 노출된 것이었다. 게슈타포는 그녀를 파비악 감옥의 고문실로 끌고 갔고, 그녀의 다리와 발을 부러뜨리며 동료와 아이들의 위치를 추궁했다. 센들레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약 한 달간의 고문 끝에 그녀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처형 당일 새벽, 한 게슈타포 간수가 그녀의 등을 떠밀어 감옥 뒷문 밖으로 내보냈다. 제고타가 그 간수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네 그녀의 처형 직전 탈출을 도왔던 것이었다. 다음 날 게슈타포 공식 명단에 그녀는 “처형 완료”로 기록되었다. 그 후 약 2년 동안 센들레르는 가명을 쓰며 폴란드 시골을 떠돌았다.

8. 1945년 다시 파낸 두 유리병
1945년 종전 후 센들레르는 사과나무 아래에 묻혀 있던 두 유리병을 다시 파냈다. 그녀는 명단을 폴란드 유대인 위원회에 넘겼고, 위원회는 그 명단을 바탕으로 살아남은 부모와 아이를 다시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약 2500명의 아이 가운데 부모가 살아남은 경우는 약 100명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모는 트레블링카에서 이미 살해된 후였다. 살아남은 아이는 폴란드 가정이나 수녀원에서 자라며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고, 어떤 아이는 종전 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본명을 알게 되었다. 한 여성은 60세가 된 후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은 한나입니다.”

9. 60년의 침묵을 깬 1999년 고교 연극
센들레르의 이름은 전후 폴란드에서 거의 잊혔다. 공산 폴란드 정부는 그녀가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조직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에 대한 보도를 사실상 금지했다. 1965년 이스라엘 야드 바셈 기념관이 그녀에게 “열방의 의인” 칭호를 처음 부여했고, 그제야 그녀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미국 캔자스주 유니언타운 고등학교의 학생 네 명이 학교 과제로 그녀의 이야기를 연극화한 “유리병 안의 생명”을 발표했고, 그 연극이 전 세계 약 300회 이상 공연되며 센들레르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2008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9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녀가 60여 년 전 게토에서 빼낸 아이들 가운데 수십 명이 노인이 되어 참석했다.

10. 한 사람의 손이 만든 2500개의 미래
센들레르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그녀가 한 일은 단순히 아이를 빼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미래를 통째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가 유리병에 적은 한 줄의 종이쪽지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 한 가족의 역사, 한 민족의 기억이었다. 그녀가 만약 명단을 만들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아이들 가운데 자신의 본명을 회복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단지 생명을 구한 것이 아니라, 그 생명들의 정체성을 함께 구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가장 사랑이 깃든 일이었다. 한 사람의 손이 적은 2500개의 이름은 그 자체로 가장 단단한 저항의 형태였다.

11. 마치며: 가장 작은 종이쪽지가 이긴 폭력
1910년 바르샤바의 한 의사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가, 1942년 게토에서 한 명씩 아이를 빼내며 그 이름을 유리병에 적었고, 1943년 게슈타포의 고문실에서 단 하나의 이름도 발설하지 않았고, 2008년 98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레나 센들레르의 일생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손이 2500명의 미래를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일까. 아니면 가장 작은 종이쪽지가 가장 거대한 폭력을 이기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일까. 사과나무 아래의 유리병이 60년 후 한 노인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 그 편지는, 한 사람의 헌신이 시간을 뛰어넘어 도달할 수 있다는 가장 따뜻한 증거였다. 그것이 센들레르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거운 유산이다.